한국, 중국은 야스쿠니 진자하면 무조건 전범자의 유골만 있다 생각하며 일본 총리 참배 반대를 하는 곳이다.
그것은 실제 야스쿠니 진자의 역사를 모르고 일방적으로 반대만을 위한 반대기 때문이다.
이곳은 전쟁으로 숨진 국가 영웅들이 있는 곳이며 2차 대전 희생자만 있는 곳이 아니기에 현충원과 같은 곳이다.
현 정치가의 선조 대부분 과거 청일 전쟁까지 거슬러가면 반드시 납골을 모시고 있다.
야스쿠니 진자에 조상의 납골이 대부분 있는 사람이 바로 일본 정치가들이기도 하다.
국가 대표는 자국을 위하여 숨진 영령들을 위하여 헌배를 하는 것은 일본인에게는 아다리마에다.
야스쿠니 진자는 明治2年(1869)6月29日에 건설되어 역사적 인물과 246万6千余柱- 약 246만 6천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다.
그러므로 일본 조상 특히 전쟁 영웅은 물론 전쟁에 희생된 어린 군인 납골도 많다.
일본에게 참배 반대라는 말이 엉뚱하고 우습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쟁은 약 69년 전이지만 이곳의 영령들은 그 이전에도 수없이 많이 안치되었다.
지금도 가족, 친지, 조상들의 영혼을 만나러 가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미타마 마츠리는 약 30만에서 50만 다녀가는 거대한 행사다.
전범자로 칭하는 자들은 미국에 의하여 사형대 이슬로 거의 사라졌다.
여기서 잠시 주지할 사실이 있다.
연합군이란 주체국 영국, 미국은 전쟁과 무관한 평화주의 국가인가 생각할 작금이다.
세계 지배를 가장 많이 한 영국이 언제부터 연합군이 되어 평화를 주창하는가.
독일을 이기기 위한 힘의 약함을 연합으로 단결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전쟁의 주동자, 전범자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계는 전쟁을 일으켰고 범죄자 국가들 태반이다.
아프리카에서 보면 영국인, 미국인은 조상 대대로 원한의 주역이듯이 말이다.
전 세계 전범자 아닌 나라가 과연 어디인가.
역사를 거슬러가면 갈수록 먹고 먹히는 사슬의 원리에 있다.
또한
일본에서 중국 보는 것과 한국에서 보는 점과 차이가 많다.
요즘 중국,한국이 우방인듯하지만 중국도 전쟁에선 결코 비켜갈 평화의 나라는 아니다.
중국은 한국 전쟁의 주동자이면서 배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주변 정치, 외교 상당히 혼란스럽다.
특히 역사를 보면 일본에 1천 회 전쟁을 일으킨 중국이 치욕스럽게 이긴 적이 없다.
중국은 일본과 전쟁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인구만 많은 나라다.
도발 자체, 전쟁, 속국 만들기를 본다면 중국이 더하면 더한 나라다.
몽골의 수난사만 해도 중국에서 독립을 원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지금은 중국을 원수처럼 생각한다.
인도, 베트남하고도 전쟁을 일으킨 나라 중국.
최근 티베트가 공산화된 것처럼. 더구나 민족 싸움도 만만치 않은 나라다.
일본에서 중국을 우습게 보는 이유는 과거사나 도발이 아니라 작금의 행위다.
억지, 가짜, 상표 모방, 만들기. 범죄자가 많은 나라로 낙인된지 오래다.
한국이 지금 전범 국가 일본에 대한 의식 이상 중국에 대한 경각심도 필요하지 않을지.
힘의 논리는 언제든지 어느 나라든지 적용되어 속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야스쿠니 미타마 마츠리 보기로 하자.
매년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미다마 마츠리라고 한다.
이 의미는 미 타마시 즉 영혼을 본다는 의미다.
여기는 가미카제로 희생된 17세부터 20세까지 군인도 많다.
죽음이 무섭고 두려운 어린 나이에 죽는 순간에도 야스쿠니진자에서 가족과 만난다는 것을 믿었던 이들.
그것이 조작이라 해도 어린 수많은 병사가 죽으면서 야스쿠니를 향했다. 죽어서도 돌아온다는 말.
국가는 그렇기에 약속으로 지키는 미다마 마츠리를 거행하는 것이며 올해 69회째다.
그 아픈 역사의 영혼들은 시간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인 중에 가족이 희생된 사람 대부분은 미타마시 자체를 믿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슬픔을 승화하는 에너르기를 가진 그 부분에 의미가 더 크다.
단순하게 어떤 교육이나 의식으로 군중은 휩쓸리지 않는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시간은 흘러도 그 명목과 약속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미다마 마츠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시 부모는 어린 아들이 매년 그날에 돌아온다 믿으며 등을 밝혔고 위안으로 삼았던 야스쿠니진자다.
여기는 주술이나 막연함이 아닌 스스로의 위안처라는 점이다.
일본인에게는 그래서 가슴아픈 곳이 야스쿠니 진자다.
그러므로 야스쿠니는 참으로 슬픈 역사의 희생자가 많다는 점이다.
글 중에 한국인 희생자가 많다는데 그 점은 잘 못 아는 부분이다.
야스쿠니에 잠든 타이완, 한국 희생자는 당시 본인 자원한 사람이다.
특히 한국, 타이완은 직접 전쟁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약 2만 정도.
나가사키, 히로시마 군부대에 있다가 원폭으로 숨진 자들이다.
일본은 속국의 국민에게는 자원을 신청받았고 본인이 원하면 군대에 보냈으나
애국의 부분에 가미카제로는 미비하다고 판단하여 선발 자격기준이 엄격하게 달랐다.
속국인 희생자 대부분 나가사키, 히로시마의 원폭맞아 군대에서 사망한 숫자다.
매년. 중국, 한국, 타이완인이 저지르는 방화 등 관련 범죄가 1960년 이래 수백 건에 이르고 있다.
벽에 방뇨, 낙서, 시위, 방화등 다양하다.
이러한 부분은 참 한심하고 어이없는 행위들이다.
미타마는 7월 13일에서 16일이고 8월 15일은 미국과 연합군에 의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으로 종전이 된 날이다.
진자 바깥은 마츠리에 온 사람들로 들끓고 어린 학생 천지다.
장사들과 유카타를 걸치고 오도리를 즐기는 것으로만 간단하게 보아선 절대 안된다.
정작 마츠리의 근원은 바로 영혼이 오는 날로 정했다.
만약 가족 중에 누군가 죽었는데 매일 망상에 사로잡혀 슬피 울면 무엇을 되돌릴 수 있는가.
일찍이 석가는 죽은 아들 때문에 슬피 우는 여인에게 죽지 않은 집의 콩을 얻어오면
아들을 살려 준다고 말한다. 온종일 동네를 다 돌고 온 여인은 콩을 구하지 못했다.
그 어떤 집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슬픔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누군가 죽어서 슬프고 괴롭고 매일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말이다.
그 죽음을 통하여 오히려 인생의 크게 깨침을 바라는 의미의 죽음인 것이다.
싸움질, 남의 비난, 온갖 악행과 악한 말의 결과인 악업이 죽음을 보게 되었다 믿는다.
그럼에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더욱더 비참하고 어려운 것은 역시 자신이다.
미다마 마츠리는 바로 이런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죽은 자와 산 자는 결코 만날 수 없으며 사실 만나지도 못한다.
죽은 날을 기억하며 의롭게 살다간 자를 만나는 것처럼 등불을 밝히는 의미다.
산 자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하여 얻어야 할 교훈이 반드시 있다.
이름이 줄줄이 달린 등. 밤에는 불을 밝힌다.
저곳에 영혼이 있다면 말이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쏟을까.
죽음과 무관한 듯 또 다른이는 춤을 추고 논다.
하지만 세상에 너도 나도 결국 다 죽을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가만 남았다.
너무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마라.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다.
화가의 연등인데 타마시라는 글 바로 혼이다.
자세히 보면 눈물이 보인다.
저 수녀님 타마시 등을 열심히 본다.
등은 많지만 느낌이 일치한 등에 마음이 가겠지.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풍랑을 만나도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쟁에서 죽은 아들의 혼령이다.
어머니에게 보내는 글이다.
피의 의미지만, 꽃잎이 떨어지며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들을 가장 사랑하고 기억한다.
동서고금, 생사귀로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아들은 어머니를 죽어서도 잊지 않는다.
어머니처럼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귀족은 7벌의 기모노를 입고 결혼한다.
그래서 겹겹이 쌓여보이는 기모노다.
아름다운 기모노를 입은 여인등
며칠간 야스쿠니 진자를 밝힐 등들이다.
가미카제로 개조하여 자폭한 비행기다.
영혼이 있다면 오늘 반드시 저들은 올 것이다.
그리운 가족도 만나고 해후가 있을 날이기에.
이곳의 서적들은 상당한 지식과 경륜이 있다.
일본의 강한 힘이 근원을 읽게 될 것이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쟁에 희생된 사람이 많다.
언제나 일방적인 생각은 위험하다.
한국, 중국에서 보는 일본은 다르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이 보는 일본은 더 다르다.
군대 포장지인데 비엔나 카레, 서바이벌 햄버거다.
일본을 움직였던 귀족의 문양이다.
일본 전체의 힘의 중심인 조상의 상징이다.
매년 나는 미타마 마츠리를 간다.
미타마 마츠리는 단순한 마츠리가 아니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거기엔 모든 생사가 훤히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산 자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으로만 살아야 한다.
자신의 인생 구걸하러 다니지도 말고 슬픔에 요란 떨 이유도 없다.
다른 사람은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도 없는 데다 떠드는 자를 더 한심하게 본다.
진정 슬픈 자는 말도 글도 필요 없으며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야스쿠니를 가 보라.
누가 슬픔을 말하고 아픔을 말하겠는가.
죽음이란 늘 같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죽는 방법이나 차이나 시간만 다를 뿐이며 결코 혼자만의 괴로움이 아님을 알게 된다.
깊은 슬픔에서 자신을 보라, 고요한 평정만이 고귀한 영혼과 만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다가올 자기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 미타마 마츠리가 아닌가 생각된 하루다.
'Japanese culture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신 예술이다. (0) | 2014.07.28 |
---|---|
방충 나무가 있다. (0) | 2014.07.21 |
歌舞伎座- 가부키자 (0) | 2014.07.14 |
朝顔 (0) | 2014.07.09 |
일본 인터넷에서 배운다. (0) | 2014.04.28 |